(사진: 드라마 오징어게임 캡쳐)
이병철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고속철도기관차승무지부 지부장)
열차 운전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겠다는 국회와 정부의 시도가 만만치 않다. 2013년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 파업이 한창이던 때 꺼내든 감시카메라 이야기가 벌써 햇수로 9년을 넘기고 있지만 번번히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막혔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설치하고 말겠다는 듯하다.
그 사이 우리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은 철도안전을 확보하려면 시스템에 대한 투자가 먼저라고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다. 그러나 저들은 돈되는 사업은 투자해도 그렇지 않은 사업은 폐기 내지는 방치하느라 시스템 내부의 불균형을 낳고, 이 때문에 사고가 나는데도 고작 종사자 처벌을 강화하는 법 만들기에 급급할 뿐이다. 흔히 정치학 등에서 말하는 정책결정자, 선택설계자 들이 이 모양이다. 감시카메라도 그런 와중에 나온 것이다.
오징어게임
나는 기관사로서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며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문득 떠올렸다. 이 드라마에서 오징어게임 참가자 456명은 상금 456억 원을 얻고 그와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쓴다. 반면 이 게임의 설계자는 감시카메라로 참가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죽음의 경기를 강요한다. 이 드라마를 보고 무한 경쟁의 냉혹한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 생활자이자 기관사로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오늘날 노동자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열차운전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겠다는 저들의 시도를 보면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국회는 감시카메라 설치가 철도와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감시는 안 되는데, 안전을 위해서라면 감시해도 된다는 저들의 논리에서,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꼬집어 비판한 스탈린주의 – 이후 변형된 형태로 존속하는 북한, 중국이나 한때 박정희 독재정권 – 의 논리와의 데자뷰를 경험하는 듯한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닐 것이다.
부드러운 개입, 넛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행동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이 공동으로 지은 <넛지>라는 책이 있다. 버락 오바마의 공공정책이론의 핵심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으로 경제학에서는 “부드러운 개입(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이라고도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에 의한 강압적인 정책은 반발심을 낳아 비용에 비해 효과도 떨어지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의원 그리고 기업의 선택설계자들이 나서서 부드러운 개입 즉, 넛지로 정책을 설계하고 이끌어 나서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이 이론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은 옷을 살 때 입어도 보고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반품도 하는 등 심사숙고하지만(숙고시스템), 인생에서 중요한 적금, 보험, 노후연금의 가입 같은 선택에는 아무 고민 없이 가입을 하기도(자동시스템) 한다. 문제는 인간이 ‘숙고 시스템’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인공지능에 가깝고, 사실은 직감에 의한 ‘자동 시스템’에 과도하게 의존해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수를 막기 위해 강압적이고 반발을 낳는 비효율적 정책이 아니라, 선택을 설계하고 부드러운 개입(넛지)을 통해올바른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철도
철도를 살펴보자. 철도 기관사들은 어려운 선발 기준을 통과하고 장시간 운전종사업무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이는 느리고 의식적이며 노력이 필요한 ‘숙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운전실에서 운전을 할 땐 ‘숙고 시스템’을 작동해 무리 없이 운전업무에 열중한다. 하지만 사고 등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기관사는 본능인 ‘자동 시스템’이 작동한다. 순간 두렵고 무섭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긴 레일 위를 달리는 기관차는 어느 순간에 어느 장소에서 예상할 수도 없이 갑작스런 이례적인 상황이 닥친다.
대형사고
고속기관사로 수십 년 간 철도차량을 운전하며 적지 않은 사고를 당해본 나의 처지에서 이례 상황이 발생하면 기관사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이런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도와줄 시스템이 필요한데, 감시카메라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녹화)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사고조치는커녕 병발사고로 이어져 대형사고를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작업환경 개선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부와 국회는 부드러운 개입을 해야 한다. 2011년 12월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발간한 『철도차량 운전실의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인간공학 평가기술 개발 보고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는 기관사의 승무 중 신체적, 정신적 상태는 인적오류에 밀접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그 요인으로 운전실의 환경(소음, 진동, 공기의 질 등), 운전실의 배치(접근성, 가시성, 의자 등), 워크스테이션 디자인(디스플레이 장비 등) 등을 예로 들었다. 다시 말해 정부와 국회 부드러운 개입으로 ‘운전실의 환경을 개선’하고 ‘운전실의 배치’와 ‘워크스테이션 디자인’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하고 설치하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정책 설계 및 집행을 할 때 ‘넛지’를 이용한 숙고 시스템을 작동해서 해당 노동자가 인간답고 살맛나게 일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안전한 선진 철도를 만들고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