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운수노조와 서울교통공사노조 역무본부가 9월 23일 서울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일터내 젠더폭력 실태와 대응방안 토론회’를 열었다. 이번 토론회는 신당역 여성노동자 직장 내 젠더폭력 살인사건 3주기를 맞아 마련된 자리였으며, 참석자들은 일터 젠더폭력을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예방과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공운수노조 조현제 여성국장은 사회를 맡으며 “노동 현장은 젠더기반 폭력의 영향을 막고 줄이기 위한 핵심 개입 지점”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용자가 폭력과 괴롭힘이 없는 환경을 만들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교통공사노조 이현경 전 여성위원장은 신당역 사건의 3주기를 돌아보며 “만약 피해자가 그날 2인 1조로 근무하고 있었다면 끔찍한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전했다. 그는 여성노동자가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조직 문화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공기업의 비용 절감 위주의 경영 방침이 여성노동자를 위험에 내모는 구조라고 지적하며, ▲2인 1조 근무제 도입을 위한 인력 확충 ▲조직문화 진단과 개선 ▲노사 여성위원회 구성 및 명예고용평등감독관 권한 강화 ▲성폭력 실태 공유와 투명한 대책 논의 등을 구체적 과제로 제시했다. 이 전 위원장은 사건 피해자가 산재로 인정받고 공사의 책임이 민사소송에서 일부 인정되었지만 기관장에 대한 제재가 전혀 없었던 현실을 꼬집으며, 기관장 책임 강화를 촉구했다.
민주노총 권수정 여성위원장은 국제노동기구(ILO) 제190호 협약의 의미와 민주노총의 반성폭력 운동 방향을 설명했다. 그는 “노동 세계의 폭력과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노동권과 기본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노총이 반성폭력 운동을 단순한 개별 사건 처리에서 벗어나 조직문화 전반을 바꾸는 방향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동지의 노동환경입니다”라는 구호를 소개하며,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행동이 동료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위계와 권력을 평등하게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또 성평등 감수성을 조직 운영 전반에 적용하고, 사업 기획과 예산에 성평등 감사를 도입하며,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반영한 영향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수수 활동가는 최근 잇따라 발생한 스토킹·교제폭력 사건을 사례로 들며 젠더폭력이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는 신당역 사건 이후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 조항이 삭제됐음에도 여전히 경찰의 현장 종결 비율이 높아 제도의 실효성이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피해자 보호 정책이 여성의 취약성만을 강조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젠더폭력이 사회적 위계와 권력, 차별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직장이 안전한 노동 환경을 보장할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직문화 진단과 개선을 제도적으로 의무화해 젠더폭력을 조직 차원에서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이종희 변호사는 신당역 사건과 관련한 민사소송 판결을 소개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법원이 서울교통공사의 개인정보보호 의무 위반은 인정했지만, 피해자의 사망과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부정한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서울교통공사가 2인 1조 근무제를 도입했다면 이번 사건은 예방할 수 있었다”며 “법원이 가해자의 범행을 ‘매우 이례적인 일’로 규정한 것은 노동자의 위험을 개인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피해자 안전을 소홀히 하는 결과라고 지적하며, 앞으로 사용자 책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적 해석이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구미영 연구위원은 직장 내 스토킹 피해 실태와 대응 체계의 한계를 짚었다. 그는 “2024년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스토킹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이 10.6%에 달했지만 제도적 변화는 체감하기 어렵다는 응답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남성 상용직과 여성 비상용직 간 제도 개선 체감의 격차가 컸다는 점을 지적하며, 법제도의 실질적 효과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구 연구위원은 많은 공공기관이 스토킹 문제를 단순히 기존 성희롱·성폭력 지침에 용어만 추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형식적인 대응은 스토킹 피해의 중요한 특징인 사전 보호 조치를 소홀히 하게 만들며, 결국 피해자의 안전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간 기업의 경우 직장 내 스토킹 대응 정책이 거의 전무한 현실을 지적하며, 젠더폭력을 중대한 위험 관리 과제로 인식하고 전문성을 갖춘 담당자를 지정해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정여진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장은 기존의 일터 위험 개념이 신체적 사고성 재해에 치중해 정신건강 문제나 직업성 질환을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여성의 일이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인식이 오히려 위험을 은폐하고 여성노동자를 취약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정 센터장은 “여성노동자의 위험은 단순히 신체적 재해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사회적 요인과 결합돼 있다”며 젠더 관점을 반영한 위험성 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영국 등 해외 사례를 언급하며,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안전보건 정책이 한국에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의 특수 위험 반영 ▲다양한 신체 조건에 맞는 보호 장비 마련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연령, 국적 등 다양성을 고려한 위험 평가 ▲젠더폭력을 포함한 무형의 위험 요소까지 평가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사건 발생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일터 내 젠더폭력에 대한 실질적 대책이 부족하다는 점이 재확인됐다. 참석자들은 신당역 사건이 여성노동자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경고였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를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제도적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 제도 마련과 조직문화의 근본적 전환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한겨레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준수해 피해자의 신상을 특정하지 않고, 사건을 구조적 문제와 제도적 대응 논의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